이민법인대양
 
충남 홍성 출신으로 토론토 인근 미시사가에서 대형 한국식품점을 운영하는 한인동포가 ‘성공한 이민자’ 사례로 캐나다 주류잡지에 크게 소개됐다.
한국식품 미시사가점의 이광형(62ㆍ사진)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 월간 ‘Canadian Immigrant’는 3월호 커버스토리에서 ‘한국 식료품업계의 왕’(Korean grocery king)이라는 제목 아래 이 대표가 이민생활 40년 만에 한국식품업계의 강자로 성장하기까지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한국태생의 이 대표(영어이름 Ken)가 군 복무 후 곧바로 가족들과 함께 이민 와서 언어장벽 등 초창기 어려움을 극복하고 식료품업계에서 성공하기까지에는 그만이 가진 특유의 근면ㆍ성실성과 정직함이 밑받침됐음을 강조했다.

1948년생으로 부친(이상호ㆍ87)이 홍성 태생인 이 대표는 서울 배재고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하던 중, 먼저 캐나다로 이민 와서 가게를 경영하던 삼촌(고 이상덕씨-홍성 출신)을 따라 전 가족이 1970년 7월에 이민 왔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그는 토론토 서쪽 벌링턴에 있는 삼촌의 일을 도우면서 가게 청소, 물건 나르기 등 비즈니스의 밑바닥부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삼촌은 그때 이씨에게 “공부를 계속할래, 가게를 할래”라고 물었으며 이씨는 주저 없이 비즈니스 쪽을 택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실질적인 생활영어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어가 어느 정도 익자 컨비니언스 체인을 맡게 됐으나 “젊은 혈기에 의욕만 앞선 탓에 별 재미는 못 봤다”고 말했다. 그는 그 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됐으며 미래 비즈니스에 대해서도 신중을 기하게 됐다.

이씨는 이어 앨버타 주 캘거리로 이주해 3년간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의 경기불황 여파로 타격을 받았다. 이씨는 그러나 낙담하지 않았으며 노스웨스트준주(NWT)의 옐로우나이프 진출을 모색하기도 했다. 당시 옐로우나이프에서 스몰비즈니스를 창업할 경우 20만 달러를 지원해주는 정부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씨는 미시사가로 돌아와 자그마한 가게를 아내(이금순)와 둘이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0년 전인 지난 2000년 현재의 대형 건물을 무역업체(PAT)를 운영하는 지인의 도움으로 사들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1만 평방피트의 널찍한 연면적을 가진 이 식품점은 그 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취급품목이 2000 종류가 넘고 연간매출이 800만 달러를 상회하며 종업원만 35명(한국, 중국계 등)을 거느리고 있다. 고객층은 한인뿐만 아니라 중국, 필리핀, 일본, 서양인 등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이 대표의 경영철학은 ‘손님은 왕’이라는 평범한 진리. 그는 “신선하고 품질이 좋지 않으면 절대로 팔지 않는다. 한번 고객의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새벽마다 온타리오 푸드터미널 등에 나가 품질 좋은 상품만 엄선해서 구입, 소비자들에게 공급한다.

비즈니스의 성공 노하우에 대해 이 대표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 따르면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려면 99%의 행운과 1%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데 나에게 그것이 따라준 것”이라고 겸손해하면서 “인생과 마찬가지로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 실패도 예상할 수 있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니 기회를 잘 포착하시라. 나는 바로 그것을 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자료 – 대전일보
 
 
애틀랜타 한인고교생이 이민생활 9년 만에 하버드에 합격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해밀턴 밀크릭 고교 졸업예정인 백승관(18ㆍ미국명 브라이언 백) 군. 백군은 올해 초 하버드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뿐만 아니라 권위 있는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밀레니엄 장학생에 선발됐으며, 밀크릭 고등학교 졸업생 대표(valedictorian)로도 뽑혔다.

더구나 백군은 9살이던 2003년 애틀랜타로 이민 온 이래, 불과 9년 만에 이 같은 성과를 거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에 대해 이군은 "영어도 제대로 못했다. 처음엔 스쿨버스에 익숙하지 멀미가 나는데도 말할 수가 없어 너무 답답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영어를 못하니 친구도 없었다. 해밀턴 밀에 한국학생은 더더욱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앓던 지병인 천식도 백군의 또 다른 고통이었다. 그런 심경을 토로할 사람도 없어 속을 끓이기만 했다.

그러나 백군은 고통을 정면으로 극복했다. "발음이나 문법이 틀려도 그냥 영어로 말해라"는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이를 악물고 영어공부에 달려들었다. 아시안으로서의 열등감은 미국문화를 닥치는 대로 배워 극복했다. 한국친구가 없는 것은 오히려 미국생활 적응에 도움이 됐다. 지병이었던 천식을 극복하기 위해 호흡에 도움이 되는 클라리넷을 연습했고, 결국 조지아 주 학생대표로 출전할 수준까지 올랐다. 백군은 "에세이에 약점을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 대학입학이나 장학금 수혜에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

백군은 합격의 비결로 '높은 목표'를 세우고 치열하게 활동한 것을 꼽았다. 백군은 또한 4년간 14개의 AP과목을 이수했으며, 풋볼 마칭 밴드, 학교 오케스트라 등에서도 활약했다. 학교 내에서 '그리닝 포워드' 등 각종 단체를 결성하는 등 정치, 환경, 교육의 다방면으로 리더십을 보여왔다. 그는 이런 경험을 살려 조지아 교육청 정책 공청회에 학생대표로 참석, 낙오아동 방지법(No Child Left Behind)에 대해 반대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백군의 이 같은 노력은 다양한 형태로 보답 받았다. 지난해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리온 파네타 국방장관,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 및 연방 의원들 만났다. 연방상원 청소년 프로그램에서 조지아 주 대표 2명중 1명으로 뽑혀 장학금과 함께 워싱턴DC로 연수를 간 것이다. 백군은 "전국에서 선발된 참가자 100명은 아이비리그를 꿈꾸는 엘리트들이었다"며 "세상이 참 넓다는 사실을 배우고 원대한 꿈을 품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백군의 하버드 합격에는 부모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애틀랜타로 이민 온 백군의 부모는 애틀랜타 남부에서 뷰티서플라이를 운영하고 있다. 백군의 부모는 하루 2~3시간의 출퇴근도 마다하지 않으며 자녀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백군의 꿈은 정치다. 지난해 청소년 정치 참여단체 조지아 지부를 창설하고 회장직을 맡아, 20개 중고등학교 및 조지아 주립대(GSU)를 대상으로 투표독려 캠페인을 벌인바 있다. 하버드에 진학하면 학부에서 정치경제를, 대학원에서 법을 공부하고 국제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한인들이 미국에서 당당하게 사는 것이 그의 꿈이다. 백군은 "한국이 약해지면 미국 내 한국계 학생들의 위치도 약해진다"며 "앞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고 통일하는데 일조해 한미 양국에 기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출처 – 미주 중앙일보
 
 
운명의 역마살(교회 집사가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되는데)때문인지 아직도 호주에 산다.
86년에 들어 왔으니 벌써 26년이나 되어 가고…
어쩌면 한국보다는 호주에서의 생활이 더 내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아 온 날보다는 호주에서 지낸 날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아스라한 기억의 어린 시절보다는 스스로 결정을 지으며 살아 온 시절이 호주가 더 많으니 내겐 더욱 정감 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젠 머리카락 한 올씩 빠지는 것에도 신경 쓰일 나이가 되었고 시장에서 파는 돋보기도 무심코 지나치지 않은 노안이 찾아 온 어느덧 반백의 나이가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은 골드코스트란 곳으로 인구 약 50만 정도의 남반구 최대의 관광지이고 시드니, 멜본에서 살다가 여기로 이사 온지 벌써 20년 정도 되어 간다. 나의 쉽게 만족하는 성격 탓도 있겠지만 내가 사는 동네는 아마도 호주에서는 제일 좋은 곳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지병으로 고생을 하셨던 아버님이 지난 92년에 이민을 오신 후 건강이 회복이 되고 매일 지침 없이 골프를 치실 정도로 강건해 지신 것이 제일 다행이다.
아버님의 건강 상태는 호주에 오시기 전까지 최악이셨다.
계속되시는 개복 수술에 몇 개의 장기를 떼어 내시고 아픔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잠도 주무시지 못해 수면제에 의존하시어 체중이 40Kg미만으로까지 가신 상태이셨다.

호주로 오신 이후 맑은 공기와 여유로운 생활, 그리고 좋아하시는 골프로 흰 머리가 자연적으로 검게 변하시는 등 아주 건강이 완전히 틀려 지셨다. 해로 78세이신데 나이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시고 골프와 낚시로 그야말로 down shift의 표본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버님의 Story는 2007년 주간 조선 9월호에서 다루기도 하였다.

우리 가족이 호주에서 사는 가장 큰 보람도 아버님의 건강 회복이고, 처음에 이민을 반대하셨던 어머님께서도 부부가 지내는 시간이 많아 지며, 아버님 병수발에 대한 스트레스를 더 이상 받지 않으셔도 되기에 아주 만족하고 계신다. 호주 오시어 세금 한 푼 내시지 않으시고도 지금은 꽤 넉넉한 금액의 노인 연금을 받으시며 병원에서의 정기 검사도 무료로 하시고 골프, 낚시, 여행 등을 즐기시니 집 안이 다 편안하고 그다지 걱정은 없는 편이기도 하다.

또한 호주는 계획에 없던 돈이 많이 들지도 않는 곳이기에 한국에서처럼 연봉이 높거나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살기에는 매우 풍요로운 편이기도 하다. 살면서 돈이 그다지 중요하다는 생각이 없기도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욕심만 없다면 호주에서는 돈이란 것이 큰 이슈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내가 편하고 만족하면 되고 오히려 과식을 걱정하는 실정이며 풍요로운 것이 아닌가.

가끔씩 호주 친구들과 Pub에서 어울리는데 벤츠를 타고 오던 오래된 구식 차를 끌고 오던 혹은 깔끔한 정장을 입던 구멍 난 티셔츠를 입고 오던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그냥 자기 마실 맥주를 자기 돈으로 내고 먹고 마시고 어울려서 즐겁게 떠들다가 오면 된다.

한국에서 제일 많이 들어가는 자녀들 교육비나 부모님의 병원비 등이 호주는 복지 혜택에 의해 전혀 지출이 없으니 많은 세금을 공제한 후의 적은 수입에도 경제적 불편함이나 스트레스를 느끼질 않는다. 어느덧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큰 딸아이에게 그간 사교육비를 한 푼도 지출을 한 기억이 없다. 대학교 학비도 장기 학자금 대출로 마련을 하였고 이는 졸업 후 수입이 생기기 시작하면 조금씩 갚게 되기에 이미 성인이 된 딸아이도 그다지 부담을 느끼지 않는 편인 것 같다.

호주는 자녀가 18세 성년이 되면 부모와는 별개의 독립체가 된다. 하여 부모에 의존하는 한국 대학생과는 달리 대부분의 호주 부모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금전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
Full Time 학생으로 공부를 한다면 일을 할 시간이 없기에 호주 정부에서 Austudy라는 명목으로 매달 약 100만원 정도의 생활비 지원을 받고 경제적인 불편 없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 이는 복지 혜택이라 갚을 필요도 없다.
아버님의 지병도 Medicare라는 복지 제도에 의해 비용 없이 거의 완쾌가 되었으니 “병원비 스트레스로 병이 더 곪는다”라는 말은 일단 호주에서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한국의 경쟁 사회에서 이기려고 안달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왜 이렇게까지 전쟁 같은 삶을 사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삶에는 정답이 없는 것이기에 누가 잘살고 있다고 이야기하긴 어렵겠지만.
이 곳은 가족 중심 생활이라 주말에는 공원에서 바베큐(동네마다 있는 공원에는 전기로 작동이 되는 철판이 있어 마켓에서 스테이크 용 고기를 사와 자주 철판 구이를 해 먹곤 한다.)도 하고 파란 하늘 보며 푸른 잔디에 아이들과 누워만 있어도 저절로 재미있어 한바탕 웃게 된다.

요사인 골프에 맛이 들어 아내와 일주일에 두 번은 필드를 나간다.
4시간 정도 평온한 초록의 환경을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즐겁고 짧은 퍼팅에도 Hi-5로 격려 해주며 가끔 “나이스 샷”이 나오기라도 하면 그 들뜬 마음을 공유하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우리집 반경 10Km이내로 골프장이 약 40여 곳이 있으니 골퍼들의 천국이라는 별칭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회원으로 있는 골프장은 1년에 약 140만원을 내면 무제한으로 치고 싶을 때 언제든 가면 된다.

호주는 밤 문화 혹은 유흥문화가 거의 없는데 젊은 나이에 호주로 와서 여기서만 쭈~욱 줄기차게 살다 보니 한국에 가더라도 한국의 유흥 문화라는 것에 적응이 잘 안되고 호주에선 10시면 자는데 밤 늦게까지 마시는 체력도 딸리고 또 비용도 만만치 않아 즐겨 하지 않는다.

사실 호주에 살면서 인종 차별도 느낀 적은 없다.
한국의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참으로 한국 내에서도 이런 저런 억울한 사연이 많은 것 같다.
먼 해외에서 이민 생활을 하면 언어나 사고 차이로 그 심리적 억울함이 증폭이 된다.
한 단면만을 바라 보는 우리의 시각도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도 부딪히며 살게 되는데 호주에서 살면서 부딪힐 때마다 차별이라고 외쳐 되면 살아 갈 방법이 없다.
마음 장난이다. 스스로 피해자가 될 필요는 없다.

나의 이야기의 첫 글은 여기까지 하고, 앞으로 내가 호주에서 26년 정도를 살면서 겪어 가는 것을 연재물로 써 볼 까 한다.

자료 – 유영석 법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