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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기 듀라코트 회장.."富 대물림 않고 사회 환원"
‘중년의 반항’. 번번이 승진에서 누락된 이방인은 51세의 나이에 사표를 내던지고 늦깎이 창업에 나선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냈다.

미국 시장 점유율 1위, 세계 ‘빅5’의 특수페인트업체 듀라코트(Duracoat)는 홍명기(78) 회장의 반항 기질을 자양분으로 태동했다.

캘리포니아주와 알라바마주에 자리잡은 3천200㎡, 6천500㎡ 면적의 공장 두 곳에서는 건축용 철근의 부식을 막는데 필요한 ‘세라나멜’을 비롯, 수백 종류의 특수페인트 제품이 생산되고 있다. 연간 3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자신에게 차별을 가한 미국 업체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팔순을 눈앞에 둔 홍 회장은 “ ‘정직’과 ‘성실’로 특수페인트 개발에만 매달리며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며 “앞으로도 한눈 팔지 않고 연구에 매진해 듀라코트를 세계 ‘빅3’ 업체로 키워나겠다”고 열정을 표출했다.

홍 회장은 언론인과 영화인으로 성공을 거둔 선친 슬하에서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가정에 소홀한 채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아버지는 그의 반항심을 키웠다. 13세 때는 가출해 일본 밀항을 시도하기도 했다.

서울대 문리대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그는 1956년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 길에 올랐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학비 송금이 끊기면서 목장에서 우유를 짜고 유대인 집에서 허드렛일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가까스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휘태커라는 페인트 회사의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홍 회장은 “미국은 기회의 땅이고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라고 믿었었는데, 28년 동안 수많은 제품을 개발해 히트시켰지만 늘 승진에서는 제외됐다”고 했다.

부인의 격려 속에 사표를 던진 그는 1986년 2만 달러를 종자돈으로 해 1인 회사를 차렸다. 몸 담았던 회사에서 방해 공작을 서슴지 않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직원도 한 명 없이 혼자서 신제품을 개발해 판로를 찾아 종횡무진 했다. 마침내 첫 거래가 성사되고 6개월 만에 15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면서 승승장구했다.

미국 내수시장을 석권하고, 한국의 대한 페인트와 노루표 페인트에 기술을 제공하는 등 세계 특수페인트 시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점했다. 한때 듀라코트 제품을 쳐다보지도 않던 일본계 철강회사 스미토모는 홍 회장을 찾아와 25년 독점 공급계약을 요청하기도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는 홍 회장의 경영 철학도 듀라코트의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낸 비결 중 하나다. 홍 회장은 “경기가 안 좋으면 종업원을 해고하는 미국식 사고방식보다는 근로시간을 줄여 함께 고통을 나누는 정(情)을 통한 경영을 실천했다”며 “직원이 감동하면 회사의 성장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 회장은 특히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실천하는데도 강한 열의를 지니고 있다. 1남3녀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자신이 쌓은 부를 대물림 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할 생각이라고 한다.

이미 2001년 ‘밝은 미래 재단’을 설립, 600만 달러를 출연한 그는 총 기금 규모를 1천만 달러로 늘려 차세대 지도자 육성과 젊은 기업가 지원, 장학 및 사회복지사업, 다인종, 다문화 교류사업 등에 쓸 방침이다. 또 재미동포 2∼3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교육기금으로 1천만 달러를 새롭게 조성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앞서 홍 회장은 폐교 위기에 처한 남가주 한국학원을 살려낸 것을 비롯해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건립, 2003년 미주한인 이민100주년 기념사업,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로 꼽히는 대한인 국민회관 복원,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설립 등 동포 사회의 숙원 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출처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