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법인대양
 
키치너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양채성(50)씨는 몇 년 전부터 가게 매출이 서서히 줄어들자 장고에 들어갔다. 업종을 전환할까, 아니면 새로운 시도를 해볼까.
부인 양복현(49)씨 역시 고민은 컸다. 이대로 가면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007년 부부는 고난과 모색의 계절을 보냈다. 그 해 여름 퍼뜩 스시바가 떠올랐다.

키치너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스시바를 편의점에 들여놓아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30대 젊은 그 친구는 색다른 시도를 했고 결과는 양씨가 봐도 좋았다. 부부가 찾아가서 젊은 ‘스승’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쾌히 승낙했다. 고맙기만 했다.
아이템을 선정하는 데까지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음식점 경험이 없다는 게 장애물이 될 수는 없었다. 부인과 역할 분담을 논의했다. 요리솜씨 좋다고 칭찬이 자자했던 부인이 스시 만드는 법을 배우기로 하고 장비와 허가 문제는 남편이 맡았다.
부인은 젊은 스승이 운영하는 편의점 스시바에 학생 겸 헬퍼로 취직했다. 남편은 가게에서 스시바에 관해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하고 전화로 물어보면서 연구했다. 살면서 부부가 함께 이렇게 열심히 공부에 몰두한 적은 없었다.
준비는 5개월간 이어졌다. 결심하는 과정이 어려웠지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관청 허가 문제도 간단했다. 시설비는 냉장고와 냉동고, 전시용 냉장고, 조리대 등 2만 달러. 공간은 계산대 빈 곳 48평방피트.
2008년 5월3일. 설레는 가슴으로 아침 7시 편의점 문을 열었다. 이날은 특별한 날. 바로 스시바를 손님들에게 첫 선을 보이는 날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부부가 놀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첫날 만들어 놓은 스시를 아침나절에 다 팔았다. 둘째 날, 셋째 날 역시 손님이 더욱 늘었다.
시작할 땐 2년 안에 투자비용을 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양씨는 7개월 만에 투자금액을 모두 건졌다며 밝게 웃었다. 역산하면 한 달에 순익 3천 달러.
정확한 자료는 아니지만 양씨는 요즘 같은 불경기에도 매출은 2008년 수준을 유지한다고 한다. 편의점 매출이 적어도 20%는 늘어난 셈이다. 물론 이는 스시를 뺀 순수한 편의점 매출만을 말한다. 더욱 희망적인 것은 요즘도 점점 단골손님 숫자가 불어난다는 사실.

“비즈니스 환경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환경 탓만 해야 하나요?”
양씨는 누구든 그 가게 주변 여건에 맞는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처음 양씨가 스시바를 한다고 하자 같은 업종 친구들은 말렸다. 돈만 날릴 우려가 크다는 게 이유였다.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겐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비록 스시바가 작은 것이지만 그래도 실천했기 때문에 보람을 누릴 수 있었지요.”

양씨가 말하는는 성공 조건은 딱 3가지.

첫째, 깨끗하게 할 것.
둘째, 중산층 이상 주민들을 대상으로 할 것.
셋째, 싼 값으로 승부하지 말 것.

스시 먹는 손님은 청결과 품질로 의사결정을 하지 값을 따지지 않는다. 양씨는 당초 학생과 간단한 점심식사 손님을 겨냥했는데 실제 이들은 없고 동네에서 비교적 여유있게 사는 사람들이 주고객으로 등장했다. 요즘 들어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찾는 손님들이 꾸준히 이어진다. 동네에서 완전히 자리잡은 셈이다.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편의점과 레스토랑이 결합한 프랜차이즈로 발전시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 놓았다. 5년. 양씨가 설정해 놓은 시한이다.그는 거품 섞인 꿈이 아니라며 너털웃음을 날렸다.

출처 - 캐나다 한국일보
 
 
미국 리코(RICOH)사 박영(54세) 프랙티스 매니저는 국내 패키지 SW를 미국시장에 수출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지난 1982년 미국에 건너가 올해로 32년째 미국 생활을 하고 있는 성공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그는 세븐일레븐에서의 아르바이트 생활(10년)을 시작으로 태권도 도장 경영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 성공을 이룬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미국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정직’과 ‘성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먹고살기 위해 미국에 갔다”

미국에는 언제, 왜 이민을 갔는가.
▶ 먹고 살기 위해 갔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런데 다 그렇게 뛰어난 실력도 없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 미국으로 건너가면 희망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보니 실제 현실은 어땠나.
▶ 생각보다는 많이 달랐고, 미국도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처음 5년여 동안은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하고, 되는 게 없나?”라며 나 자신보다는 주변 환경에 불만과 원망을 많이 했다. 그러나 5년여 기간이 지난 후 모든 것은 나 자신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실질적으로 그때부터 본격적인 미국 생활이 시작됐다고 본다.
처음에는 일할 곳이 없어 노가다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24시간 편의점인 세븐일레븐에서 어느 날 한 점원이 나오지를 않아 대신 일을 하게 됐고, 이곳에서 인정을 받게 돼 8개의 편의점까지 관리하게 됐다. 세븐일레븐에서만 11년 근무했다.
그러던 중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던 지인이 2개도 관리하기가 힘든데, 어떻게 8개나 관리하느냐며 태권도장을 같이 경영해 보자고 제안을 해 자리를 옮겨 태권도장을 운영 관리하게 됐다. 태권도는 공인 6단이다.
다행히 태권도장은 잘 돼 뉴욕에서만 6개를 운영(1991년~1993년)했다. 태권도장을 운영하면서 최고경영인들을 가르치게 됐는데, 태권도장을 더 크게 운영하기 위해 이들에게 경영진단을 의뢰했다. 당시 그들의 경영진단 결과는 ‘F학점’이었다. 즉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자동차도 없고, 휴가도 없는 운영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해서 그들은 태권도장 운영을 그만두고 세일즈를 권장했다. 당시 전자문서관리 시장이 미약하지만 앞으로 뜰 가능성이 높다라며 이와 관련된 회사에 지원하라고 컨설팅을 해줬다. 심지어 그들이 LA에 있는 IT 관련 기업이 인력을 채용한다며 알려주기까지도 했다.
그래서 태권도장 운영을 그만두고 무작정 이 회사에 지원했다. 그 회사(Lazer Fich, 종이를 스캔해서 이미지화 하는 전문 기업)는 IT도 모르면서 어떻게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라며 조건부 입사를 허락해 줬다. 다시 말해 이 회사는 뉴욕과 뉴저지에서 연간 4,000달러를 판매해야만 한다는 조건이었다.
어쨌든 딜러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기도 하고, 직접 영업도 하면서 2년 만에 22만 달러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시켰다. 이를 계기로 리코사에 입사(2001년)하게 됐다.
당시 영업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영업의 초점을 사는 사람의 입장에 맞춰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파악해 관심을 끌었다. 그러한 전략은 맞아떨어졌고, 결국 성공적인 영업을 하게 됐다.

미국시장에서의 성공을 위한 10계명
1. CEO입장이 아닌 시장에서 요구하는 제품을 개발하라(마케팅에서 요구하는 제품을 개발하라)
2. PT(Presentation)나 도큐먼트(Document)에서 한국의 냄새를 빼라
3. 공략하고자 하는 인더스트리에 맞춰 전문성까지 고려한 제품을 개발하라
4. 자기들만의 컬러를 내지 말고, 고객에 맞춰라
5. 잘 아는 지인들에게 너무 의지하지 마라(영어를 잘 안다고 비즈니스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6. 직접 영업보다 리셀러를 통해 진출하라
7. 계획 했으면 그대로 밀고나가라. 안 된다고 물러서지 마라
8. 과학적인 PT를 통해 30분 내에 다음 초청을 받을 수 있도록 철저한 공부와 노력, 연습을 하라
9. 콘택 드라이브(e-메일, 전화)를 미국 시간에 맞추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10. 제품을 판매하겠다는 생각보다 도와주겠다는 마음으로 고객에 접근하라

출처 – ITDaily
 
 
26년 전 처음에 호주에 유학 갔을 때는 시드니 Neutral Bay라는 지역에서 살았는데 아마 지금도 호주에서 가장 비싼 지역 중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약 2년간의 직장 생활에서 모아 둔 돈과 적금 해지, 그리고 퇴직금 등을 갖고 왔으니 절대로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정보가 발달이 된 것도 아니었고 호주 한인 교회 목사님께 사전 연락을 하여 지인의 주소를 받아 첫 둥지를 틀게 된 곳이 바로 Neutral Bay이다.

시드니 하버 북쪽에 위치하여 Ferry(배)를 타고 오페라 하우스나 하버 브리지를 지나 시내에 있는 영어 학교까지 다녔는데 자연과 어울어진 도시의 장엄함에 늘 감탄하곤 했다.
하버를 가득 메운 요트의 평온함에서 삶의 질을 느끼고 선착장(Circular Quay)에서의 거리의 악사나 삐에로는 처음 시작하는 이국 생활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곤 했다.

시드니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호주의 시골 지역에서 사시는 분들은 시드니 시내를 복잡해서 정신 없다 느끼실 텐데 당시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거대한 도시의 맑은 공기, 현재와 옛날의 건물이 잘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다.

더욱이 더운 날씨에 옷을 얇게 입어 속 옷의 끈이 다 보이는 호주 여자들의 옷 차림새 때문에 시내와 Circular Quay라는 곳에서는 항상 심장이 방망이치는 소리가 들리곤 하였다.

근데 문제는 Neutral Bay란 곳의 물가가 장난이 아니어서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한달 만에 저렴한 동네인 Marricville이란 곳으로 시원 섭섭한 마음을 갖고 옮기게 되었다.

Neutral Bay에서 방하나를 사용할 때는 주당 A$185(26년 전 가격으로 지금의 약 20%의 수준 정도일까? 내 방에서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의 꼭대기 부분이 보였다)였는데 당시 Marricville은 시내에서 가깝지만 호주인들이 약간은 기피하는 이민자 중심의 동네였기에 A$45정도로 무려 4배를 줄일 수가 있었다.

이사를 한 후로 삶의 질 (Quality of Life)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Marricville은 레바논, 베트남, 그리스 사람들이 서로 상권을 가지고 다투고 있어 늘 조용하지 못했고 집들도 연립 주택이 많은 곳이었고…
지금 기억으로 필리핀 사람이 이웃에 있었는데 밤늦게까지 노래를 불러 잠을 설치곤 했는데 아마도 상당한 프로 급이어서 오히려 조용한 날에는 그 놈 목소리(?)가 그리워지기 까지 했다.

Neutral Bay에 있었을 때는 한정된 돈을 아까기 위해 늘 슈펴 마켓에서 구이 통닭(이게 제일 쌌다. 한 마리에 2불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지금도 10불 정도 한다. 호주도 물가가 많이 올랐다.) 두 마리로 하루를 보내었는데 Marricville에 와서는 돈에 여유가 생기니 한끼에 4불 정도했던 월남 국수도 먹고 빅맥을 남에게 사준 기억도 있다.
Marricville에서는 샴푸도 좋은 것을 썼으며 생활고 없는 편한 삶을 즐기게 되었다.

학교는 Uni. of NSW를 다녔는데 다음 해에 멜본의 Monash University란 곳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시드니에서 공부할 때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헤어지는 것이 싫은 탓으로 열심히 꼬드겨서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 결혼을 하여 멜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대학 동아리에서 알게 된 미모의 교포 처녀를 다양하게 활용했다.
알바를 소개해 달라는 것부터 학교 Assignment의 영어 문장 Check, 햇볕이 눈부시거나 날씨가 기막힌 날에는 공원 등에서 외로움을 달래는 말동무 상대가 되기도 했고 한국 식당밥이 아닌 집에서 만든 밑반찬과 김치 등을 조달 받기도 하였다.
같이 청소 알바를 하면서도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은 마음씨가 마음에 들었고 영어가 짧은 내 과제 report를 거의 써 주다시피 하여 도움을 많이 주었지만 무엇보다 얼굴이 예뻤다.
아내가 그 때 내 꼬임에 넘어 가지만 않았어도 지금쯤은 클래식 들으면서 요가나 즐기는 사모님 포스였을텐데…

현재는 같은 회사에서 이민 법무사로서 일을 하고 있으며 내 상관이기도 하다.
가녀린 어깨로 고객의 두터운 서류 뭉치를 끙끙대며 들고 다니고 Client와 신경 쓰며 점심 식사를 한 뒤에 소화 안 된다며 소화제를 찾거나 Client 일로 잠을 못 이루고 새벽까지 뒤척거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요샌 저녁 식사 후에 같이 운동 나가자고 팔 소매를 끌어 당기는 모습이 예쁘다.
하지만 카드 청구서가 나오는 날에는 날 선 칼처럼 어김없이 쓴 소리를 쏟아 내는 마녀가 되기도 한다. 평소에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이 가족들을 위해서 살아 있는 대게를 칼로 내리 칠 때도 마녀가 된다.

이런 아내와 24년을 살다 보니 가끔은 호흡 곤란 증세(숨막히게 예쁜 여자와 24년 정도를 살아 보라) 혹은 편두통(아찔하게 예쁜 여자와…) 그리고 시력 저하(눈부시게 예쁜 여자와…) 증세도 있고, 아직도 아내가 화장실도 안가는 여자(변비가 심한 것은 사실이다.)로 비쳐 질 때도 있다.
이런 아내 이야기를 한국 사람들에게 하면 정신 착란 증세로 오해를 받거나 심한 집단 따돌림을 당하지만 호주 친구들은 맞장구를 쳐 준다. 한국인과는 극과 극의 비교체험처럼 반응이 다르다.

난 수처작주라는 말을 매우 좋아한다. 쉽게 풀자면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가끔 “우리”라는 명목 아래 “나”의 희생을 강요 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호주에선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통하질 않는다.
물귀신처럼 끌고 다니는 경우도 거의 없다. 더군다나 술자리에선…
어느 문화가 더 좋은 지는 주관적인 시각이라 가늠할 수 없지만 나는 많이 호주 사람화가 진행된 느낌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인데 굳이 남에 말에 휘둘리거나 상처를 받아 가슴 아파 할 필요는 없다.
남이 무어라 하든 나는 나 자신일 뿐이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내 전부보다는 자신이 이해하는 만큼 의 일부 혹은 자신이 끼고 있는 색안경을 통해 보고 이야기한다. 하여 어떠한 감정적 호소나 냉철한 논쟁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의 일부일 뿐이거나 나에겐 반드시 색안경이 있으니(이 색안경을 벗기려 하면 난리가 난다.)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자기보다 남에게 더 많이 신경 쓰시는 분들이 약간은 가엽게 느껴질 경우도 있다.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는데 호주 주요 신문 기사에는 리플을 달 수 있는 곳이 없다.

또한 아무리 친한 호주 친구라도 돈 거래는 잘 하질 않는다.
나 역시도 부탁이 온다면 친한 Bank Manager의 전화 번호를 줄 뿐이다.
호주 사람화가 많이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지수가 떨어질 날이 없고 아이들에겐 ‘나는 바담풍을 해도 너는 바람풍을 해라’라는 식이어서 아직도 away 경기를 하는 것 같고 어정쩡한 경계인 같다.

자료 – 유영석 법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