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법인대양
 
박 대표는 미국에서 태어난 재미동포가 아니다. 단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야 하는 20대 풋풋한 아가씨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간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사업 실패를 겪은 아버지는 몸이 안 좋았다. 제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책임감이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 당시, 24살이었던 박 대표는 주중엔 한인광고에서 일하고, 주말엔 시장에서 옷을 떼다가 노점상에서 팔며 생계비를 마련했다. 어찌 보면 그가 패션계에 뛰어든 계기다.

박 대표의 타고난 패션 감각때문이었을까. “놀랍게도 주말 동안의 노점상 수익이 주중에 광고회사에서 받았던 급여를 훌쩍 넘을 정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이로써 그는 과감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노점상 일에 매진한다.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노점상에서 생긴 수익으로 가게를 확장시키며 흑인지역, 백인지역, 멕시칸지역 등 총 6개의 가게를 단기간에 열었다. 박 대표는 “그 당시(1985년) 6개 가게의 총 수익은 하루 평균 800불이었다. 크리스마스와 같은 성수기엔 하루 매출이 2만3000불에 달했다”고 했다.

1987년, 옷 만드는 일에 관심이 생긴 박 대표는 6개의 가게를 모두 정리하고, 봉제공장을 운영하게 된다. 봉제공장은 패션 브랜드의 하청업체였다. 그는 기업에서 주문한 대로 옷을 만들어주는 일을 했다. 이곳에서 탄생한 그의 경영철학이 지금의 성공에까지 이끌었다. 바로 ‘시간 약속 엄수’다.

공장 문을 연 첫해(1987년)에는 100만불(한화 약 10억) 정도의 수익을 올린다. 이후 그는 1993년도엔 1년 매출을 1000만불(한화 약 100억)까지 갱신하며 탄탄한 회사로 키워왔다.
그러던 중 박 대표는 본격적으로 패션업계에 뛰어들 기회를 만난다. 그녀의 고객이었던 씨위 데님과 레이븐 데님이 경영위기를 맞아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할 수 없게 된 것. 그는 패션계에서 오랫동안 몸담은 안목으로 그 두 회사의 가능성을 예측하고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맡았던 경영 위기의 두 회사는 2년 만에 5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해 그를 ‘패션계의 해결사’로 불리게 했다.

“모든 비즈니스의 시작은 남을 위한 배려다.” 박 대표만의 특별한 성공비결을 묻는 질문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기자는 성실함, 인내, 노력, 재능 등의 진부한 단어들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박 대표의 ‘배려’공식은 그가 지금까지 사업을 일구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씨위 데님과 레이븐 데님, 그리고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박 대표에게 항상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는 회사 직원들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 그는 여러 개의 회사를 운영하지만 여유롭게 휴가를 즐길 정도로 직원들과의 신의가 두텁다.

박 대표는 회사 직원들을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 종종 ‘엄마’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직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려를 해주었는데 이젠 오히려 제가 그들에게 배려를 받고 있다”며 행복한 마음에 눈시울을 붉혔다. 노점상에서 패션 브랜드의 CEO가 된 박 대표는 말한다. “난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출처 – 머니투데이 대학경제